"一切唯心造"라 하였던가!!!
자연스럽게 "원효"스님 이야기를 아니 할수 없다.
두차례에 걸쳐 당 유학을 시도 했던 그가 문득 크게 깨달아 당나라로 가던 발길을 돌린 사연은 이러하다.
원효의 나이 34세 때에 당에 유학키 위해 평생의 도반인 "의상"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요동까지 갔다가 고구려 순라꾼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고 45세때 다시 의상과 해로로 길을 잡아 백제땅인 당주계(오늘의 경기도 화성)로 향하였다.
항구에 도착하니 날은 어둡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땅막을 찾아 하루를 유하게 되는데 밤중에 갈증을 느껴 바가지에 고인물을 달게 마셨고 단잠을 잔후 날이 밝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이 거한 곳은 무덤 안이었고 밤중에 달게 마신물은 해골 안에 고여 있는 물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아 하루를 더 지체하다가 밤중에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크게 깨닫게 되는데 "心生卽種種法生"이요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니 내용인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어제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히 잘수 있었고 해골을 바가지로 보았을 때는 감로수 였던 물이 실체를 알고 나니 역겨웠던 것을 자각하여 누구나 생각에 따라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생각을 멀리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없어 진다는 "일체유심조"라는 원효사상의 기초를 만들면서 당행을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染淨不二 眞俗一如" 는 그의 학문적 이론이자 종교적 실천으로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니고 진리의 길과 세속의 길이 본래는 같다"는 이해는 나중에 과부인 요석궁의 공주에게 육보시를 하여 짧은 인연에 아들 "설총"을 낳게 되며 스스로 승복을 벗어 던진채 "소성거사"로 자처한 일은 분명 파격 이었다. 하나 겉으로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만 볼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십팔유현중 에서도 첫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이렇듯 원효는 칠십 생애를 자주적인 기성인이자 위대한 사상가로 성속을 넘나드는 민중의 구제자로 한시대를 열정적으로 살다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