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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젼리더십

나의 가나안 농군학교 체험...


# 1995년 겨울 나는 회사에 들어온지 몇 해 되는 때 우연한 기회에 일가 김용기 선생이 만든 가나안 농군학교에 1주일간 입교하여 체험교육을 받는 기회가 있었다... 내 일생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삶의 모토가 되고 턴닝 포인트가 되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 어떤 사람은 변화가 쉽게 일어 나겠는냐,, 교육 몇 일로 되겠는냐 하는 회의감도 많다...맞는 말이다.. 그러나 꼭 맞는 말도 아니다...변화는 노래 한곡에,, 누구와 악수 한번에,, 누구의 강의 하번에 몇시간 만에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누구가 그 변화의 시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아침 신문에 모 컬럼리스트가 쓴 글이 내가 경험했던 내용과 너무나 일치하여.. 나의 체험을 대신하여 글을 옮겨 적는다.... 

# 일가(一家) 김용기(1909~1988)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어제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일가의 생애, 사상, 그리고 글로벌 빈곤퇴치운동’을 주제로 한 국제 세미나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농협중앙회 대강당에서는 일가상 및 청년일가상 시상식과 제2회 가나안 세계 농군대회 및 비전 선포식을 겸한 ‘일가 김용기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린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여전히 낯선 그의 이름이 내게 특별한 까닭이 있다.

# 고3 시절,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가나안농군학교에 가서 일하겠다고 생떼 아닌 생떼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김용기’라는 사람에 대해 우연히 알고 나서 갖게 된 생각이었다. 고3 수험준비생이 다니던 학교마저 자퇴하고 대학 대신 농군학교에 가겠다고 난리 치게 만들었던 그 사람. 비록 그 후에 나는 단 한 번도 생전에 그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김용기라는 그 이름은 분명 나의 ‘멘토’였다.

#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제1)가나안농군학교 교정에는 산소통으로 만든 일명 ‘개척의 종’이 있다. 교육생을 깨우는 기상나팔 격인 이 종은 김용기 선생이 처음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웠던 1962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명물이요 상징이다. 그동안 하도 쳐대서 깨지고 부서져 교체된 종이 벌써 5개째다. 김용기 선생은 매일 새벽 4시30분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개척의 종’을 치면서 사람들을 깨웠다. 잠만 깨운 것이 아니라 정신을 깨운 것이다.

# 1908년 경기도 양주군 봉안마을에서 태어난 김용기 선생은 23세 때인 1931년 덴마크의 이상촌 운동을 모델로 삼고, 신앙적으로는 ‘복민(福民·복받는 백성)’ 사상에 바탕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고향에서 이상촌(理想村) 건설을 시작했다. 그는 “조국이여 안심하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한 ‘봉안 이상촌’에 이어 삼각산 농장과 ‘에덴향 이상촌’을 개척한 후 1954년 11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지금의 하남시 풍산동 산52-2번지 일대)의 3000여 평방미터를 개간해 제3이상촌인 가나안 농장을 세웠다. 그리고 여기에 1962년 2월 정식으로 가나안농군학교를 열었다. 김용기 선생이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할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 “치약은 3㎜ 이상 짜면 안 된다. 비누도 남자는 세 번 여자는 네 번만 문지른다. 밥알은 단 한 톨도 남기지 마라. 세수할 때는 물을 대야의 70%만 떠서 사용해라. 설거지나 샤워할 때 물을 계속 틀어놓지 마라. 음식 한 끼에 반드시 4시간씩 일하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버는 재주 없거든 쓰는 재주도 없도록 하자.” 텔레비전의 극한체험 행동강령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실은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선생이 몸소 실천한 가르침이다. 실제로 한국인 5000만이 매끼 1알의 밥알을 버리면 5000만 개의 밥알을 버리게 된다. 보통 밥 한 사발이 2500알쯤 되므로 매끼마다 2만 그릇을 버리는 셈이다. 그러니 국민 1인당 밥알 하나만 아껴도 2만 명이 먹고 살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실천과 가르침은 실질적이다.

# 일가 김용기 선생의 실천적 가르침이 살아있는 한, 조국은 안심해도 된다. 망하지 않고 흥한다. 단지 돈이 많아지면 한 나라가 강성한 것이 아니다. 정신이 강해져야 그 나라가 강성한 것이다. 빈곤의 시대엔 근검절약을 통해 가난을 이겨내게 만들고 풍요의 시대에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도록 자극하고 독려하며 삶의 질서를 다시 세우라고 가르치는 일가 김용기 선생.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땀 흘리지 않는 것을 부정하고 땀 흘린 것의 가치를 소중히 하라는 그의 정신과 가르침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