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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젼리더십

치유의 말 "나는 바보야"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 잡혀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란클이 직접 쓴 죽음의 수용소에는 그럼에도 인생에는 예스를 말한다(Trotzdem Ja Zum Leben Sagen)”란 글이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예스를 말하는 바보 같지 않는 바보짓, 삶의 진정한 성공을 위한 비법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이것을 삶의 존엄성을 되찾는 키워드로 제시 한 바 있다. 추기경님 생전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성중고 100주년 기념전에 제목이 바보야란 제목으로 자화상이 공개된 적도 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전시회에 나온 김 추기경님의 작품 20여 점은 모두편안하고, 한두 번 쓱쓱 그어 내린 산과 새, 옛집과 기차 등이 옛 선비의 문인화를 닮았다. 특히 옛집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마저 연상 시킨다.채움이 아닌 비움의 미학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보다 앞선 또 한 분의 바보는 200년 타계한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1976년 평생 동지였던 아내 우향 박내현의 죽음으로 공허해진 마음을 달래려고 운보가 시도했던 바보산수연작이 생각난다. 우리 민화에 바탕을 둔 넉넉하고 능청스러운 그림에 바보란 이름을 붙였던 운보는 내가 바로 바보야, 그러니 익을 때 까지 계속하는 거야, 관 속까지 붓을 가지고 갈 거야라고 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한 분의 바보가 있다. 예수님이다. 호주신학자 마이클 프로스트는 바보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의 혁명적 삶을 바라보는 두 음절로 요약 했다.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의 위선을 무장해제 했던 예수의 힘은 바로 바보의 단순성과 정직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바보의 순진성은 어떤 난관과 갈등도 이겨내는 활력소가 된다고 강조했다.  , 바보는 백치(白痴)가 아니다. 백지 상태의 어린이가 아니라 경험 많은 현자의 인생관이다. 나와 너를 함께 생각하는 여유와 유머가 없이는 절대 바보가 될 수 없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우보만리(牛步萬里) .“어리석어 보여도 조금씩 흙을 옮기면 산을 옮길 수 있고, 소 걸음이 느려도 만리를 간다.”라는 것처럼 사는 것이 어떨까?

 

 

진정한 바보가 만들어가는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스스로 말하는 사람의 품격을 떨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높여주는 이상한 마법을 말나는 바보야를 스스로 외치며 이제 생활 속에서 겸손의 미덕으로 삼으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