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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젼리더십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철로 만들어진 재료를 양쪽에서 잡아당겨 완전히 끊어지게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순서가 탄성(彈性)영역ž소성(塑性)영역을 차례로 거쳐 파괴에 이른다.  이 영역은 다음과 같은 실험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양종서, 기계 이야기 중에서)

 

먼저 재료에 센서를 부착해 힘을 주면서 늘어나는 길이를 측정해 보자. 처음 일정 정도까지 가해 주는 힘에 비례해 재료가 늘어난다.  힘을 5kg 줄 때 0.1mm 늘어 났다면 10kg을 가하면 0.2mm 늘어난다. 늘어난 길이가 육안으로는 잘 보일 만큼 작고, 힘을 제거하면 원래의 길이로 돌아간다. 여기가 기계공학의 전문용어로 표현 하자면 탄성영역이다.  일정한 충격으로부터 일종의 자연적 회복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힘을 점점 더 많이 주다 보면 아주 약간의 힘을 더 줬는데도 길이가 쭉 늘어나는 순간이 있다. 이때는 힘을 제거해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다시 원상회복이 되지 않는 것을 소성영역이라 한다.  이 영역에서 힘을 약간만 더 주게 되면 재료는 완전히 파괴된다. 콘크리트나 유리처럼 깨지는(취성파괴) 물질 일부를 제외하면 자연계 대부분의 재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파괴에 이른다.  

 

이러한 내용은 재료역학 교과서 첫 장에 소개되는 기계공학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 중 하나다. 이 기초적인 현상을 잘 관찰하면 인생사의 중요한 삶의 법칙 하나를 알게 된다.

 

정상적인 세상은 대부분 안정적인 탄성영역에서 움직인다. 한강 다리 위를 수 많은 자동차가 지나다니지만 자동차의 무게 때문에 일어난 미세한 변형은 차가 지나가면 곧바로 원상상태로 회복되어 교각의 모양이 늘어지는 일이 없다. 이는 어떠한 충격도 바로 원상회복이 된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오르막 길도 있고 내리막 길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양한 사유로 종종 고통과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원하는 학교 진학의 어려움, 낙방, 사업의 도산과 조직 내에서의 스트레스 등 이러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탄성영역의 폭을 넓혀야 한다. 이를 회복지수(Resilience Quotient)라 부른다.  탄성영역을 벗어나 소성영역에 들어가면 다시는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행히도 완전한 소성단계니 파괴단계로는 쉽게 들어 가지는 않는다. 설사 들어 간다 하더라도 탄성영역으로 회복될 수 도 있다.

 

회사든 가정이든 파벌간의 대립, 구성원간의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있다. 탄성영역의 충돌이라면 싸움이 끝나고 화해하면 아무일 없었던 듯 다시 화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화해해도 서로의 앙금이 가시지 않고 전과 같은 동료애나 가족애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회복 불가능의 영역인 소성영역의 변형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기까지는 아직 파괴 된 상태는 아니다. 진정 파괴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유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파괴나 붕괴는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에 이상신호를 발견할 수 있는 일명 소성영역이 존재한다. 일종의 경고 기간이 있는 것이다. 경고신호 즉 소성영역이 감지됐을 때 적절한 대응만 잘 해도 손상을 입을지언정 파괴는 막을 수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전에도 수시간 동안 이상조짐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다만 그때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거나 못해서 비극을 불러왔을 뿐이다.   

 

이런 결과를 보면 재미있게도 인간미나 인간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기계공학에서도 삶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사건과 심리적 파괴에는 그전에 이상신호가 온다. 그것에 적절한 대처를 잘 해야 한다. 그리고 웬만한 것은 다시 원래대로 회복이라는 자연의 진리가 적용된 다는 점도 우리들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탄성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에도 탄성영역이 존재한다. 그리고 소성영역 단계까지 갔다면 바로 회복은 어렵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탄성영역까지 돌아가 원상회복이 가능하다.  어떠한 힘든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이간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 설 수 있다. 그것도 오뚜기 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이것 또한 인생 사는 맛이 아니겠는가.